※외부 사이트에 게재했던 글을 옮겨오면서 일부 수정.
본문의 게임화면은 모두 PS용 오리지널판 「발키리 프로파일(이하 VP)」에서 캡처한 것입니다.
▷간단 소개
트라이 에이스 제작, 에닉스(현 스퀘어 에닉스)에서 발매를 맡아 1999년에 내놓은 액션RPG. 그리스 신화보다는 다소 지명도가 낮은 북유럽 신화를 기반으로 하여 신계전쟁 '라그나록'에 얽힌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
공식 사이트 : http://www.valkyrieprofile.com/
▷스토리
긴 잠에서 깨어난 전쟁의 여신 발키리는, 최고신 오딘으로부터 거인족과 신들의 최종전쟁인 '라그나록'에 대비하여 인간 전사들의 영혼을 천상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임무를 수행하면서 접하게 되는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 그리고 발키리 자신과 신계전쟁의 뒷면에 감추어진 진실….
죽음의 저편을 나아가는 전사들. 그들 앞에 놓인 결말은 신조차도 알 수 없다.
▷게임의 흐름
플레이어는 전쟁의 여신 발키리가 되어, 싸움터에서 죽음을 맞이한 인간들의 영혼을 모으는 역할을 맡게 된다. 주된 임무는 인간계 미드가르트를 살펴보면서
정신집중 → 동료 이벤트 → 던전 탐색
을 되풀이하여 동료들을 모으고 단련시켜 신계 발할라에 전송하는 것으로, 선택된 전사들은 '아인페리아'로 불리우며 신계에서 벌어지는 거인족과의 전쟁에서 활약하게 된다.
게임은 8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고 각 챕터는 다시 일정 단위(피리어드)로 이루어지는데, 동료를 찾거나 던전을 탐색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피리어드와 챕터가 진행된다. 각 챕터가 종료될 때마다 신계에서의 전쟁상황과 전송된 아인페리아의 근황이 표시되고, 가끔씩 스토리에 관련된 이벤트가 발생하기도 한다. 최종 단계에 들어서면 플레이어가 게임을 어떻게 이끌어 왔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3가지의 엔딩이 기다리고 있다.
활동의 주요무대가 되는 던전은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의 난이도 설정에 따라 그 종류와 출현 숫자, 내부구조까지 달라진다. 던전 탐색은 기본적으로 각종 지형지물과 정석을 이용해 진행하는 퍼즐식 액션으로, 일부 장소를 제외하면 그리 어렵지는 않은 편이다.
간단하면서도 짜임새있게 만들어진 전투 시스템은 VP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부분. 전투에 참가하는 4명의 파티원은 패드의 4버튼에 각각 대응되어 있어, 복잡한 조작이 필요없이 버튼만 눌러 주면 해당 캐릭터가 무기/마법으로 적을 공격한다. 동료 캐릭터는 사용하는 무기나 공격형태, 타격점이 각기 다른데, 이를 잘 조합하면 연속공격으로 경험치에 보너스를 받거나 다음 행동까지 걸리는 시간이 단축되기도 한다. 또한 콤보 게이지를 채운 후에는 강력한 결정기나 대마법을 발동시켜 단숨에 적을 쓸어버릴 수도 있다.
개인 아이템이나 MP 따위에 잔신경을 쓸 필요 없이, 리듬액션을 즐기는 기분으로 버튼을 타닥거리고 있으면 쑥쑥 올라가는 콤보 게이지와 화려한 필살기를 감상할 수 있다.
엔딩을 다 보았어도 즐길 거리는 잔뜩 남아있다. 난이도별로 획득 아이템이 달라진다든지, BGM이나 캐릭터 보이스 등의 전통적인 모으기 메뉴. VP의 세계를 남김없이 맛보기 위해서는 최소한 3가지 난이도로 한 번씩은 플레이해 봐야 한다.
본편과는 또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숨겨진 던전에서는 터무니없이 강력한 적들과 초절정 사기급 아이템(+ α)이 완전정복을 노리는 플레이어들의 혼을 불태울 것이다.
▷잘 만들었지만 완벽하진 않다
북유럽 신화를 변용한 참신한 세계관, 유명 일러스트레이터의 캐릭터와 섬세한 그래픽, 일류 성우들의 멋진 연기, 인상적인 음악, 단순한 경험치 노동을 뛰어넘어 독특한 재미를 선사하는 전투 시스템 등등….
본작을 이야기할 때면 으레 칭찬거리로 쓰이는 재료들이다. 위에 적은 장점에 대해서는 직접 플레이해 보면 몸으로 느낄 수 있을 터이니, 굳이 여기서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면에서 수작을 넘어서는 괜찮은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선뜻 대작이나 명작 칭호를 붙이기엔 지나치기 힘든 단점들 역시 많다.
제작진은 그렇게도 '새로움'을 강조하고 싶었을까? 메뉴를 열면 의미불명의 수많은 약어와 수치들이 화면에 들어차 있다. 처음엔 뭔가 싶어서 잔뜩 긴장했다가, 다른 게임에서도 쓰이는 용어를 이름만 바꾼 것이 대부분이고(DME란 게 결국은 HP와 같은 뜻), 몇몇을 제외하면 의미를 몰라도 게임 진행에 큰 어려움이 없다는 걸 알고 나서는 힘이 쪼옥.
설명서에 용어해설이 실려 있긴 하지만, 일본어도 모르면서 무작정 게임을 시작한 대다수 한국인 유저들에게는 글자 몇 줄이라도 압박이 아닐 수 없다.
어디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불친절한 게임 진행.
3가지의 멀티엔딩이 있지만, 실제로 엔딩까지 플레이하는 동안 게임상에서는 여기에 대한 힌트를 전혀 얻을 수 없다. 정보가 부족하고 제대로 된 공략도 없었던 발매 초기엔 몇 번씩 엔딩B만 보다 접어버린 플레이어들도 꽤 많았다. 본작이 한국에 알려졌을 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 그나마 다행인 건 게임잡지나 인터넷 사이트에서 충실히 공략을 해 주었다는 정도.
설정상으로는 개성 넘치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게임 안에서는 외모나 공격형태, 결정기 그래픽을 제외하면 각자의 특성을 찾기가 힘들다. 스킬이나 마법들이 전부 공통이라서 레벨이 올라 모든 스킬을 끝까지 배우고 나면 그 나물에 그 밥이 되어버리기 때문. 풍부한 설정을 살려서 캐릭터 속성에 따라 장비 제한을 둔다거나, 다른 사람은 쓸 수 없는 전용 특기를 만들어 주는 것도 좋았을 텐데.
마지막으로 최대의 문제점인 버그. 자잘하거나 애교스러운 수준을 넘어서, 멀쩡히 플레이하던 도중에 게임을 리셋해야 될 정도로 치명적인 것들도 있다. 던전의 특정 위치에 걸려서 캐릭터가 움직이지 않는다거나, 심지어는 한창 전투중에도 CD(물론 정품)를 못 읽겠다며 화면을 멈추고 끽끽 비명을 질러댄다. 한참 전에 세이브해 놓은 긴긴 던전에서 이런 꼴을 당하면….
각종 리뷰나 감상에서 본작이 나쁜 평가를 받은 경우는 대부분이 버그 때문이었다. 공략 사이트에 '버그 증상 및 대처법'이 리스트까지 만들어져 별도 항목으로 내걸릴 정도라니. 더구나 패치도 불가능한 콘솔용 게임에서! 어쩌다 한 번도 아니고, 특정 상황에서 확실하게 문제가 터진다면 정말 심각한 거 아닌가?
▷지극히 기본적인 의문 - 감상하는 롤플레잉?
본작의 장르는 '액션 롤플레잉'. 외국 신화에서 빌려오긴 했지만 나름대로 변형시킨 스토리도 괜찮고, 수많은 등장 캐릭터들도 -설정상으로는- 개성이 뚜렷하고 매력적이다. 시원시원 진행할 수 있는 던전이나 전투 파트도 충분히 합격점… 그런데 뭔가 찜찜하다. 어딘가 개운치가 않다. 액션RPG에서 액션은 이만하면 됐고… RPG??
RPG를 RPG답게 만들어 주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중에서도 배경세계의 현실감과 주변인물과의 대화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서양식이든 일본식이든, RPG의 세계에서는 허름하나마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과 지나가는 엑스트라1에게도 최소한의 대화는 마련해 주고 있다. 이들은 플레이어가 자신과 주인공을 동일시하며 게임에 빠져들 수 있도록 해 주는 기본적인 장치인 것이다.
캐릭터나 스토리가 화려한 가구나 실내장식이라면 그것들을 담고 떠받치는 배경세계는 주춧돌이나 기둥, 탄탄한 외벽과도 같다. 최고의 각본에 일류 배우들이 출연해도 무대가 부실하면 그 연극은 싸구려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이런 기준에서 봤을 때, 본인이 평가하는 'RPG로서의 VP'는 낙제점을 면할 수 없다.
VP의 인간세계인 미드가르트의 마을이나 도시에는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 정보와 사람들이 모이는 주점이나 여관, 물건 파는 상점은 물론 거리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도 없다. 인간세계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이런 최저한의 구성요소들이 결핍되어 있어서 도무지 현실미가 느껴지지 않는다.(주1)
그나마 몇 없는 마을에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이라곤 두어 채뿐이고, 한 줌도 되지 않는 마을사람들은 달랑 대사 하나. 챕터는 계속 지나가고 이야기는 엔딩을 향해 치닫는데, 스토리상 벌어지는 강제이벤트를 제외하면 아무런 변화도 없다. 게임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산골마을 물레방아는 계속 돌아가고, 사람들은 내내 같은 자리에 서서 대사 한 글자도 바뀌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마을에는 동료 구하러 한 번, 이벤트나 유품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다시 들르고는 땡. 다음부터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나마 마을 모양새라도 갖추고 엑스트라도 대사 두어 줄씩은 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다른 일본식 RPG들과 비교하기가 민망해진다.
각 챕터가 끝나고 신계로 돌아가 보면 현재 전황에 관해 설명을 해 주지만, 그 설명이란 것도 덜렁 그래프 한 장에 대사 몇 마디가 고작인지라 전혀 느낌이 오지 않는다. 열심히 키워 올려보낸 아인페리아의 활약상도 마찬가지 취급. 일단 신계로 전송해 버리면 그대로 엔딩 볼 때까지 이별이다.
절절한 사연을 겪으며 발키리에게 부름받은 영혼들 역시 일단 동료가 되고 나면 존재감을 멀찌감치 내던져 버린다. 전세계에서 온갖 잡다한 인간들이 모여들었으면 자기네끼리 티격태격하거나 주인공에게 몇 마디 건넬 법도 한데, 그런 일은 전혀 없다. 그네들이 나설 자리라고는 유품이나 스토리 관련 몇몇 이벤트(그것도 일부 캐릭터 한정), 그리고 전투화면이 고작. 나머지 시간엔 경험의 보주나 쓰다듬으며 짐짝처럼 메뉴 한 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게임 안에 현실세계로서 존재해야 할 인간계와 신계, 그리고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동료들마저도 주인공과는 완벽히 단절된 채 겉돌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게임은 장대한 세계관과 엄숙한 분위기를 앞세워 근사하게 출발하지만, 본편 스토리는 결국 발키리와 중요인물 몇 명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상을 주며,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가 자신의 의지로 시나리오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다른 엔딩을 볼 수 있다고는 하나, 이를 위해서는 게임을 시작할 때부터 정해진 패턴과 숫자를 맞추며 일정한 루트를 따라가야 하고, 그 결과 롤플레잉 게임의 참재미라고 할 수 있는 '플레이어 자신이 게임을 이끌어가는 자연스러운 감각'과는 동떨어진 '제작진이 던져주는 스토리 쫓아가기'에 머물고 만다.
줄거리는 눈과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지언정 '발키리 = 나'라고 가슴으로 느끼면서 함께 이야기에 빠져들지 못한다면, 전세계의 운명이 걸린 거대한 드라마가 한낱 잘 만들어진 종이인형극 수준으로 한없이 초라해져 보이는 달갑지 않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정신없이 연극을 감상하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배우들의 열연에 가려 눈에 띄지 않던 허술한 무대장치.
스포츠 게임을 기동시키고 3D 모델링과 모션 캡처로 실제인물을 빼닮은 선수들이 뛰노는 경기장에 집중하다 색종이를 덕지덕지 붙여놓은 듯한 썰렁한 관중석에 무심코 눈길이 갔을 때.
첫 플레이의 흥분과 엔딩의 여운에서 벗어나 차분히 둘러본 발키리 프로파일의 세계는 그런 느낌을 주었다. 이벤트에나 쓰이고 마는 1회용 소품이 아닌, 게임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또다른 현실을 보여주는 세계. 그런 가능성이 엿보이는 설정자료집을 뒤적이며, 그것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본편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주1) 작품의 원전이 되는 북유럽 신화는 그리스 신화에 비해 인간계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고, 게임 설정과 시스템의 특성상 VP에는 여관이나 상점같은 인간세계의 시설이 필요없다. 캐릭터나 스토리 외의 부분을 간략화시킨 것은 "딴 데 신경쓰지 말고 여기에 집중해!"라는 제작진의 노림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게임 진행에 필요없는 부분에까지 일부러 수고를 들일 이유가 없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간단히 끝날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테마로 다루고 있는 본작에서, 단순히 게임과 상관없다는 이유로 사소하지만 플레이어의 정서에 직접 와닿는 이런 부분을 소홀히 취급했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롤플레잉 게임을 하는 이유는 멍하니 버튼을 두드리며 숫자놀음과 동영상을 감상하기 위함이 아니라, 게임세계의 일부가 되어 그 안의 인물들과 함께 호흡하며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화려한 그래픽과 예쁜 캐릭터에만 신경쓰는 수많은 일본식 RPG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를 본작 역시 피해가지 못했다.
인간과 신의 중간자가 되어 인간세상을 여행하고, 거기서 살아가는 인간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길을 찾아 나아가는 발키리. 그리고 모니터 앞에서 게임을 마주하고 있는 유저 역시 인간이다. 주제의 전달이나 결말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라도 인간세계를 좀 더 깊이있게 다루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총평
그래픽이나 음악, 성우 연기 등등,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요소들은 흠잡을 데가 없다. 실제 플레이를 해 봐도 퍼즐 요소를 가미한 액션게임으로서 나무랄 데 없는 수준. 하지만 그런 장점들 이상으로 크게 다가오는 문제들이 있다. 불친절한 게임 진행과 치명적인 버그, '롤플레잉'이라는 딱지를 달고 있으면서도 플레이어에게 구경꾼 이상의 역할은 끝내 주어지지 않는 일방적인 구성.
값비싼 한정판과 설정자료집, 사운드트랙까지 구입할 만큼 푹 빠져서 재미있게 즐겼고, 누가 물어봐도 열렬한 팬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지만, 한발 물러서서 냉정한 눈으로 평가해 보면 명작으로 올라서기 위한 마지막 능선에서 발을 헛디뎌 한 단계 미끄러져내린 듯한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FF4 이후로 줄곧 느껴왔던 일본식 RPG에 대한 의문점과 불만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두고 싶다.
본문의 게임화면은 모두 PS용 오리지널판 「발키리 프로파일(이하 VP)」에서 캡처한 것입니다.
PS판 발매 당시의 오리지널 표지.
PSP판의 '레너스'라는 부제는 속편이 제작되면서 구별을 위해 붙은 것.
어느 틈엔가 이름 철자도 LENUS → LENNETH로 슬그머니 바뀌었다.
PSP판의 '레너스'라는 부제는 속편이 제작되면서 구별을 위해 붙은 것.
어느 틈엔가 이름 철자도 LENUS → LENNETH로 슬그머니 바뀌었다.
▷간단 소개
트라이 에이스 제작, 에닉스(현 스퀘어 에닉스)에서 발매를 맡아 1999년에 내놓은 액션RPG. 그리스 신화보다는 다소 지명도가 낮은 북유럽 신화를 기반으로 하여 신계전쟁 '라그나록'에 얽힌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
공식 사이트 : http://www.valkyrieprofile.com/
▷스토리
긴 잠에서 깨어난 전쟁의 여신 발키리는, 최고신 오딘으로부터 거인족과 신들의 최종전쟁인 '라그나록'에 대비하여 인간 전사들의 영혼을 천상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임무를 수행하면서 접하게 되는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 그리고 발키리 자신과 신계전쟁의 뒷면에 감추어진 진실….
죽음의 저편을 나아가는 전사들. 그들 앞에 놓인 결말은 신조차도 알 수 없다.
옛 울프팀 시절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오프닝 애니메이션.
▷게임의 흐름
플레이어는 전쟁의 여신 발키리가 되어, 싸움터에서 죽음을 맞이한 인간들의 영혼을 모으는 역할을 맡게 된다. 주된 임무는 인간계 미드가르트를 살펴보면서
정신집중 → 동료 이벤트 → 던전 탐색
을 되풀이하여 동료들을 모으고 단련시켜 신계 발할라에 전송하는 것으로, 선택된 전사들은 '아인페리아'로 불리우며 신계에서 벌어지는 거인족과의 전쟁에서 활약하게 된다.
게임은 8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고 각 챕터는 다시 일정 단위(피리어드)로 이루어지는데, 동료를 찾거나 던전을 탐색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피리어드와 챕터가 진행된다. 각 챕터가 종료될 때마다 신계에서의 전쟁상황과 전송된 아인페리아의 근황이 표시되고, 가끔씩 스토리에 관련된 이벤트가 발생하기도 한다. 최종 단계에 들어서면 플레이어가 게임을 어떻게 이끌어 왔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3가지의 엔딩이 기다리고 있다.
미드가르트 상공에서 정신을 집중하면 동료 후보자나 던전의 위치 정보를 알려준다.
활동의 주요무대가 되는 던전은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의 난이도 설정에 따라 그 종류와 출현 숫자, 내부구조까지 달라진다. 던전 탐색은 기본적으로 각종 지형지물과 정석을 이용해 진행하는 퍼즐식 액션으로, 일부 장소를 제외하면 그리 어렵지는 않은 편이다.
밀고 당기고, 줄타기에 슬라이딩, 공중부양까지… 다채로운 액션.
정석 사용법을 확실히 익혀 두어야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다.
지도상의 적들을 공격하거나 접촉하면 전투 개시. 정석으로 얼리거나 회피용 아이템으로 통과할 수도 있다.
정석 사용법을 확실히 익혀 두어야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다.
지도상의 적들을 공격하거나 접촉하면 전투 개시. 정석으로 얼리거나 회피용 아이템으로 통과할 수도 있다.
간단하면서도 짜임새있게 만들어진 전투 시스템은 VP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부분. 전투에 참가하는 4명의 파티원은 패드의 4버튼에 각각 대응되어 있어, 복잡한 조작이 필요없이 버튼만 눌러 주면 해당 캐릭터가 무기/마법으로 적을 공격한다. 동료 캐릭터는 사용하는 무기나 공격형태, 타격점이 각기 다른데, 이를 잘 조합하면 연속공격으로 경험치에 보너스를 받거나 다음 행동까지 걸리는 시간이 단축되기도 한다. 또한 콤보 게이지를 채운 후에는 강력한 결정기나 대마법을 발동시켜 단숨에 적을 쓸어버릴 수도 있다.
개인 아이템이나 MP 따위에 잔신경을 쓸 필요 없이, 리듬액션을 즐기는 기분으로 버튼을 타닥거리고 있으면 쑥쑥 올라가는 콤보 게이지와 화려한 필살기를 감상할 수 있다.
공격이든 마법이든 버튼 4개로 모두 해결. Simple is the best!
"그 몸에 새기거라!" 발키리의 결정기 니벨룽 발레스티.
"그 몸에 새기거라!" 발키리의 결정기 니벨룽 발레스티.
엔딩을 다 보았어도 즐길 거리는 잔뜩 남아있다. 난이도별로 획득 아이템이 달라진다든지, BGM이나 캐릭터 보이스 등의 전통적인 모으기 메뉴. VP의 세계를 남김없이 맛보기 위해서는 최소한 3가지 난이도로 한 번씩은 플레이해 봐야 한다.
본편과는 또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숨겨진 던전에서는 터무니없이 강력한 적들과 초절정 사기급 아이템(+ α)이 완전정복을 노리는 플레이어들의 혼을 불태울 것이다.
전투시 대사가 기록되는 보이스 콜렉션. 100%를 채워 캐릭터 일러스트를 보려면 중노동 필수.
숨겨진 던전에서 놀고 싶으면 HARD에서만 출현하는 특정 아이템을 모아야 한다.
숨겨진 던전에서 놀고 싶으면 HARD에서만 출현하는 특정 아이템을 모아야 한다.
▷잘 만들었지만 완벽하진 않다
북유럽 신화를 변용한 참신한 세계관, 유명 일러스트레이터의 캐릭터와 섬세한 그래픽, 일류 성우들의 멋진 연기, 인상적인 음악, 단순한 경험치 노동을 뛰어넘어 독특한 재미를 선사하는 전투 시스템 등등….
본작을 이야기할 때면 으레 칭찬거리로 쓰이는 재료들이다. 위에 적은 장점에 대해서는 직접 플레이해 보면 몸으로 느낄 수 있을 터이니, 굳이 여기서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면에서 수작을 넘어서는 괜찮은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선뜻 대작이나 명작 칭호를 붙이기엔 지나치기 힘든 단점들 역시 많다.
제작진은 그렇게도 '새로움'을 강조하고 싶었을까? 메뉴를 열면 의미불명의 수많은 약어와 수치들이 화면에 들어차 있다. 처음엔 뭔가 싶어서 잔뜩 긴장했다가, 다른 게임에서도 쓰이는 용어를 이름만 바꾼 것이 대부분이고(DME란 게 결국은 HP와 같은 뜻), 몇몇을 제외하면 의미를 몰라도 게임 진행에 큰 어려움이 없다는 걸 알고 나서는 힘이 쪼옥.
설명서에 용어해설이 실려 있긴 하지만, 일본어도 모르면서 무작정 게임을 시작한 대다수 한국인 유저들에게는 글자 몇 줄이라도 압박이 아닐 수 없다.
어디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불친절한 게임 진행.
3가지의 멀티엔딩이 있지만, 실제로 엔딩까지 플레이하는 동안 게임상에서는 여기에 대한 힌트를 전혀 얻을 수 없다. 정보가 부족하고 제대로 된 공략도 없었던 발매 초기엔 몇 번씩 엔딩B만 보다 접어버린 플레이어들도 꽤 많았다. 본작이 한국에 알려졌을 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 그나마 다행인 건 게임잡지나 인터넷 사이트에서 충실히 공략을 해 주었다는 정도.
말 잘 듣는 착한 신에겐 칭찬과 포상이, 말 안 듣고 반항하면 무자비한 숙청이.
설정상으로는 개성 넘치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게임 안에서는 외모나 공격형태, 결정기 그래픽을 제외하면 각자의 특성을 찾기가 힘들다. 스킬이나 마법들이 전부 공통이라서 레벨이 올라 모든 스킬을 끝까지 배우고 나면 그 나물에 그 밥이 되어버리기 때문. 풍부한 설정을 살려서 캐릭터 속성에 따라 장비 제한을 둔다거나, 다른 사람은 쓸 수 없는 전용 특기를 만들어 주는 것도 좋았을 텐데.
마지막으로 최대의 문제점인 버그. 자잘하거나 애교스러운 수준을 넘어서, 멀쩡히 플레이하던 도중에 게임을 리셋해야 될 정도로 치명적인 것들도 있다. 던전의 특정 위치에 걸려서 캐릭터가 움직이지 않는다거나, 심지어는 한창 전투중에도 CD(물론 정품)를 못 읽겠다며 화면을 멈추고 끽끽 비명을 질러댄다. 한참 전에 세이브해 놓은 긴긴 던전에서 이런 꼴을 당하면….
각종 리뷰나 감상에서 본작이 나쁜 평가를 받은 경우는 대부분이 버그 때문이었다. 공략 사이트에 '버그 증상 및 대처법'이 리스트까지 만들어져 별도 항목으로 내걸릴 정도라니. 더구나 패치도 불가능한 콘솔용 게임에서! 어쩌다 한 번도 아니고, 특정 상황에서 확실하게 문제가 터진다면 정말 심각한 거 아닌가?
캐릭터 스킬 목록은 후반에 가면 전부 찍고도 포인트가 남아돈다. 몇몇 스킬은 버그로 아예 효과가 없음.
HARD에서만 등장하는 귀하신 캐릭터 리세리아. 멋모르고 신계로 보냈다간 버그 때문에 영원히 안녕이다.
HARD에서만 등장하는 귀하신 캐릭터 리세리아. 멋모르고 신계로 보냈다간 버그 때문에 영원히 안녕이다.
▷지극히 기본적인 의문 - 감상하는 롤플레잉?
본작의 장르는 '액션 롤플레잉'. 외국 신화에서 빌려오긴 했지만 나름대로 변형시킨 스토리도 괜찮고, 수많은 등장 캐릭터들도 -설정상으로는- 개성이 뚜렷하고 매력적이다. 시원시원 진행할 수 있는 던전이나 전투 파트도 충분히 합격점… 그런데 뭔가 찜찜하다. 어딘가 개운치가 않다. 액션RPG에서 액션은 이만하면 됐고… RPG??
RPG를 RPG답게 만들어 주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중에서도 배경세계의 현실감과 주변인물과의 대화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서양식이든 일본식이든, RPG의 세계에서는 허름하나마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과 지나가는 엑스트라1에게도 최소한의 대화는 마련해 주고 있다. 이들은 플레이어가 자신과 주인공을 동일시하며 게임에 빠져들 수 있도록 해 주는 기본적인 장치인 것이다.
캐릭터나 스토리가 화려한 가구나 실내장식이라면 그것들을 담고 떠받치는 배경세계는 주춧돌이나 기둥, 탄탄한 외벽과도 같다. 최고의 각본에 일류 배우들이 출연해도 무대가 부실하면 그 연극은 싸구려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이런 기준에서 봤을 때, 본인이 평가하는 'RPG로서의 VP'는 낙제점을 면할 수 없다.
경험치 모아서 레벨 올라가면 RPG 아니냐고? 그럼 이건?
RPG의 레벨업 요소를 도입해 오락실에서 인기를 누렸던 「천지를 먹다(1989)」.
RPG의 레벨업 요소를 도입해 오락실에서 인기를 누렸던 「천지를 먹다(1989)」.
VP의 인간세계인 미드가르트의 마을이나 도시에는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 정보와 사람들이 모이는 주점이나 여관, 물건 파는 상점은 물론 거리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도 없다. 인간세계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이런 최저한의 구성요소들이 결핍되어 있어서 도무지 현실미가 느껴지지 않는다.(주1)
그나마 몇 없는 마을에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이라곤 두어 채뿐이고, 한 줌도 되지 않는 마을사람들은 달랑 대사 하나. 챕터는 계속 지나가고 이야기는 엔딩을 향해 치닫는데, 스토리상 벌어지는 강제이벤트를 제외하면 아무런 변화도 없다. 게임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산골마을 물레방아는 계속 돌아가고, 사람들은 내내 같은 자리에 서서 대사 한 글자도 바뀌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마을에는 동료 구하러 한 번, 이벤트나 유품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다시 들르고는 땡. 다음부터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나마 마을 모양새라도 갖추고 엑스트라도 대사 두어 줄씩은 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다른 일본식 RPG들과 비교하기가 민망해진다.
각 챕터가 끝나고 신계로 돌아가 보면 현재 전황에 관해 설명을 해 주지만, 그 설명이란 것도 덜렁 그래프 한 장에 대사 몇 마디가 고작인지라 전혀 느낌이 오지 않는다. 열심히 키워 올려보낸 아인페리아의 활약상도 마찬가지 취급. 일단 신계로 전송해 버리면 그대로 엔딩 볼 때까지 이별이다.
절절한 사연을 겪으며 발키리에게 부름받은 영혼들 역시 일단 동료가 되고 나면 존재감을 멀찌감치 내던져 버린다. 전세계에서 온갖 잡다한 인간들이 모여들었으면 자기네끼리 티격태격하거나 주인공에게 몇 마디 건넬 법도 한데, 그런 일은 전혀 없다. 그네들이 나설 자리라고는 유품이나 스토리 관련 몇몇 이벤트(그것도 일부 캐릭터 한정), 그리고 전투화면이 고작. 나머지 시간엔 경험의 보주나 쓰다듬으며 짐짝처럼 메뉴 한 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게임 안에 현실세계로서 존재해야 할 인간계와 신계, 그리고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동료들마저도 주인공과는 완벽히 단절된 채 겉돌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게임은 장대한 세계관과 엄숙한 분위기를 앞세워 근사하게 출발하지만, 본편 스토리는 결국 발키리와 중요인물 몇 명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상을 주며,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가 자신의 의지로 시나리오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다른 엔딩을 볼 수 있다고는 하나, 이를 위해서는 게임을 시작할 때부터 정해진 패턴과 숫자를 맞추며 일정한 루트를 따라가야 하고, 그 결과 롤플레잉 게임의 참재미라고 할 수 있는 '플레이어 자신이 게임을 이끌어가는 자연스러운 감각'과는 동떨어진 '제작진이 던져주는 스토리 쫓아가기'에 머물고 만다.
줄거리는 눈과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지언정 '발키리 = 나'라고 가슴으로 느끼면서 함께 이야기에 빠져들지 못한다면, 전세계의 운명이 걸린 거대한 드라마가 한낱 잘 만들어진 종이인형극 수준으로 한없이 초라해져 보이는 달갑지 않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정신없이 연극을 감상하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배우들의 열연에 가려 눈에 띄지 않던 허술한 무대장치.
스포츠 게임을 기동시키고 3D 모델링과 모션 캡처로 실제인물을 빼닮은 선수들이 뛰노는 경기장에 집중하다 색종이를 덕지덕지 붙여놓은 듯한 썰렁한 관중석에 무심코 눈길이 갔을 때.
첫 플레이의 흥분과 엔딩의 여운에서 벗어나 차분히 둘러본 발키리 프로파일의 세계는 그런 느낌을 주었다. 이벤트에나 쓰이고 마는 1회용 소품이 아닌, 게임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또다른 현실을 보여주는 세계. 그런 가능성이 엿보이는 설정자료집을 뒤적이며, 그것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본편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주1) 작품의 원전이 되는 북유럽 신화는 그리스 신화에 비해 인간계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고, 게임 설정과 시스템의 특성상 VP에는 여관이나 상점같은 인간세계의 시설이 필요없다. 캐릭터나 스토리 외의 부분을 간략화시킨 것은 "딴 데 신경쓰지 말고 여기에 집중해!"라는 제작진의 노림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게임 진행에 필요없는 부분에까지 일부러 수고를 들일 이유가 없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간단히 끝날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테마로 다루고 있는 본작에서, 단순히 게임과 상관없다는 이유로 사소하지만 플레이어의 정서에 직접 와닿는 이런 부분을 소홀히 취급했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롤플레잉 게임을 하는 이유는 멍하니 버튼을 두드리며 숫자놀음과 동영상을 감상하기 위함이 아니라, 게임세계의 일부가 되어 그 안의 인물들과 함께 호흡하며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화려한 그래픽과 예쁜 캐릭터에만 신경쓰는 수많은 일본식 RPG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를 본작 역시 피해가지 못했다.
인간과 신의 중간자가 되어 인간세상을 여행하고, 거기서 살아가는 인간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길을 찾아 나아가는 발키리. 그리고 모니터 앞에서 게임을 마주하고 있는 유저 역시 인간이다. 주제의 전달이나 결말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라도 인간세계를 좀 더 깊이있게 다루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디자인 원안대로 충실하게 재현된 거리. 그러나 '예쁜 배경그림' 이상의 의미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똑같은 대사만 읊고 있는 당신은 대체….
이런 상황에서 똑같은 대사만 읊고 있는 당신은 대체….
▷총평
그래픽이나 음악, 성우 연기 등등,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요소들은 흠잡을 데가 없다. 실제 플레이를 해 봐도 퍼즐 요소를 가미한 액션게임으로서 나무랄 데 없는 수준. 하지만 그런 장점들 이상으로 크게 다가오는 문제들이 있다. 불친절한 게임 진행과 치명적인 버그, '롤플레잉'이라는 딱지를 달고 있으면서도 플레이어에게 구경꾼 이상의 역할은 끝내 주어지지 않는 일방적인 구성.
값비싼 한정판과 설정자료집, 사운드트랙까지 구입할 만큼 푹 빠져서 재미있게 즐겼고, 누가 물어봐도 열렬한 팬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지만, 한발 물러서서 냉정한 눈으로 평가해 보면 명작으로 올라서기 위한 마지막 능선에서 발을 헛디뎌 한 단계 미끄러져내린 듯한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FF4 이후로 줄곧 느껴왔던 일본식 RPG에 대한 의문점과 불만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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