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사이트에 게재했던 글을 옮겨오면서 일부 수정.


세계대전으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후. 동부의 열도연합공동체(ETU)에서는 차기 주력병기 개발계획 'Next E'가 진행되고 있었다.
인간과 병기가 융합된 새로운 개념의 생체컴퓨터 'E시리즈'. 이들은 조정상태에 따라 타입 화이트(자율사고형)/블랙(절대복종형)으로 나뉘어, 정식채용을 위한 최종 운용테스트에 임하게 된다.



▷간단 소개
코가도 스튜디오의 곰돌이팀에서 2006년 발매한 턴제 전략게임. 전투 파트의 난이도를 낮추고 주역캐릭터로는 메카 + 미소녀, 여기에 유명 성우들을 기용하여 시뮬레이션과 미소녀 게임 팬층을 모두 목표로 삼은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공식 홈페이지(체험판 다운로드 가능)


▷전투 파트 - 액티브 턴을 채택한 대전략?
캠페인 모드를 선택하면 플레이어는 E시리즈 타입 화이트의 지휘관 '미하라 소령'이 되어 정식채용을 놓고 타입 블랙과 모의전투를 수행하게 된다. 게임은 「대전략」 시리즈와 흡사한 턴제 시뮬레이션으로, 지도상에 있는 거점을 점령·자금을 입수하면서 병력을 생산해 적을 제압하는 방식이다.
단, 아군과 적이 교대로 움직이는 일반적인 턴제와 달리 본작은 유니트 종류나 행동여부에 따라 이후의 행동순서가 달라지는 액티브 턴 시스템을 채용하고 있으며, 파워돌 시리즈와 같이 '시야'라는 개념이 존재해서 아군의 수색범위 밖에 있는 적은 볼 수도 공격할 수도 없기 때문에, 각 유니트의 성능과 상성을 파악하고 변화하는 전황에 신중히 대처해야 한다.

차세대 병기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이게 되는 E시리즈. 왼쪽부터
아이젠(보병), 네이(차량/전차), 유리(포병), 소우카(항공기), 히소카(함선)
상황과 용도에 맞추어 다양한 유니트를 생산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자.

전투는 고풍스러운 2화면 분할식. 선공이 반격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기왕 성우를 쓸 바엔 기합이나 비명소리도 넣고 그럴싸한 연출을 해 주었더라면.

지도상의 거점을 점령하면 획득자금이 늘어나고, 공장이나
공항같은 생산시설에서는 추가로 유니트를 생산할 수 있다.

아군 승리로 미션이 끝나면 플레이 내용에 따라 랭크가 매겨진다. 생환율과
제압률이 높더라도 기준 턴수보다 빨리 클리어하지 못하면 S등급을 받을 수 없다.

격추수를 올려 포인트가 모이면 추가 복장을 구입한다. 각종 능력치를 올려주지만
생산비용이 증가하는 등 부작용(?)이 있다. 미션을 시작하기 전에 교환장착 가능.


챌린지 모드에는 단편 시나리오 20개가 준비되어 있으며 캠페인 모드에서 클리어한 맵도 다시 즐길 수 있다. 캠페인에서 받은 평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좋은 성적을 받을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재도전!

맵 에디트 모드는 초기배치, 날씨, 생산조건 등 게임에 적용되는 모든 요소를 직접 조정하여 독창적인 미션을 만들어낼 수 있다. 물건너 몇몇 팬사이트에서는 자기가 만든 맵 파일을 서로 교환하여 즐기는 게시판도 운영중.

색칠공부하는 기분으로 슥삭슥삭~



▷어드벤처 파트 - 무난한 스토리, 매니악한 패러디
캠페인 모드의 각 스테이지 사이에는 인터미션 형식의 어드벤처 파트가 삽입되어 스토리가 진행되는데, 곳곳에 블랙유머와 매니악한 군사물 관련 패러디가 난무한다. 그것도 「파이어 폭스」나 「A특공대」부터 「붉은 10월호」에 「건담SEED」 등등, 지명도나 연대, 매체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종합선물세트. '군사물 + 미소녀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의식한 계산인지, 아니면 단순히 작가의 취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원전을 아는 사람은 미하라 소령과 E시리즈들이 나누는 만담(?)을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스토리 자체는 딱히 모나지도 않고 밋밋하지도 않은 평범한 내용. 단순한 모의전투에서 군 내부의 알력 → 외국과의 마찰로 스케일이 커지며, 소소한 반전이나 복선도 준비되어 있다. 이런 종류의 게임에서 시나리오는 덤 취급을 받는 것이 보통인데, 본작은 온갖 패러디와 캐릭터들의 톡톡 튀는 대화, 이를 잘 소화해낸 실력파 성우들의 연기 덕분에 그럭저럭 읽는 맛이 있다. 군사 관련 패러디나 성우를 보고 구입한 사람이라면 꽤 만족스러웠을지도.

대륙군의 위대하신 지휘관 슈탈힌 장군. 모델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도 많겠지?

(화장중인 네이에게)"언니, 왜 거울 앞에서 얼굴을 토닥거려요? 찌메리트 코팅?"
"울부짖는 로터! 울려퍼지는 '발퀴레의 비행!' VIVA, 지옥의 묵시록!"
…이런 대사를 들으면서 조용히 미소짓는 당신은 밀리터리 매니아.



▷플레이 감상
어드벤처 파트는 선택지도 없고 게임 진행과는 상관없는 부분이므로, 플레이 감상이라고 해도 사실상 전투 파트에 대한 불평불만과 험담이 전부.

1. 작고 보기 불편한 지도화면
지도가 너무 작아서 유니트를 알아보기가 힘들다. 후반으로 가면서 맵이 넓어지고 병력이 많아지면 화면에 손대기가 싫어질 지경.
다른 지점을 보기 위해선 일일이 클릭으로 지도를 움직여야 하는 것도 짜증. 스크롤 타입 설정 옵션이나 미니맵 정도는 구세기 작품에도 기본으로 딸려 있는 기능이다.

화면 해상도에 비해 지도 크기가 작아서 유니트들을 눈으로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2. 슬라임 수준으로 멍청한 AI
체력 100이면서 빈사지경에 빠진 적을 앞에 두고 후퇴하거나, 연료와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바로 곁에 있는 아군 도시를 지나쳐 그대로 돌격하는 환상적인 인공지능. 실수로 아군 유니트에 대고 '위임(おまかせ)'을 클릭했다면 곧바로 마우스를 내던지고 싶어질 것이다. 게임 후반에 병력이 너무 많아져서 일부러 숫자를 줄이고 싶을 경우가 아니라면 이 메뉴의 존재가치는 찾을 수 없다.

3. 불합리/불친절한 시스템
세이브가 전투화면에서만 가능. 특정 대화를 다시 보거나 장착한 복장을 교체하려면 긴긴 인터미션을 처음부터 다시 지켜봐야 한다.
게임중 메뉴에는 '로드'가 없다. 세이브를 불러오려면 게임 중간에 항복 → 재시도 NO → 초기화면으로 나가는 번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한참 열올리며 플레이하던 도중에 '미션 실패', '항복'같은 글자들을 보게 되면 정신건강에도 좋을 리 없다.
전투화면에서는 우클릭이 취소버튼이면서, 타이틀 메뉴나 세이브/로드화면에서는 좌·우클릭이 모두 결정버튼이라는 터무니없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세이브할 곳을 잘못 눌렀다가 취소하려고 무심코 우클릭을 했더니 덮어쓰기가 되더라'는 피눈물나는 사연도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그렇게 우클릭이 소중하면 왼손잡이용 마우스 설정을 옵션에 넣든지. 이건 아무리 봐도 플레이어 엿먹이기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게임 내 옵션은 볼륨조절, 화면효과 ON/OFF가 전부.
이런 썰렁한 옵션화면은 건발키리 이후 오랜만이군….


4. 가장 치명적인 결점 - 유니트간 능력치 밸런스가 엉망이다!!
우선, 턴제 전략게임에는 기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ZOC(주1)가 없어서, 적들이 밀집해 있든 인접해 있든 모든 유니트는 언제나 자신의 최대 이동력만큼 움직일 수 있다. 이 때문에 전선(戰線)의 존재가 유명무실해지고, 길목을 막아 거점을 방어하는 등의 전략적인 플레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동력이 높으며 지형에 영향을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항공기 유니트가 병력 운용에서 자연스레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전투기의 넓은 시야와 우수한 이동력, 폭격기의 강력한 화력과 상성(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유니트에 대해 압도적으로 우세), 헬기의 수송능력과 대지공격력. 본작에서 소우카가 지닌 능력은 가히 만능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항공기들이 공항이 아닌 공장이나 항구, 심지어 일반 도시에서도 보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연료가 적다는 약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국 맵의 크기가 커지는 게임 후반에는 그녀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자제심이 강하거나 불리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즐기는 M틱한 플레이어가 아니라면 '초반엔 돈 모일 때까지 참고 견뎠다가 나중에 소우카 왕창 뽑아내서 머릿수로 밀어붙이기' 같은 단순 패턴이 스테이지마다 반복될 뿐. 작전이니 전술이니 운운할 구석이 없다.

이에 비해 유일하게 소우카에게 천적이 될 수 있는 유리(포병)는 행동순서와 이동력이 처지고, 사정거리와 공격력 부족으로 극초반 몇몇 스테이지를 제외하면 활약할 기회가 없다. 심하게 말해서 '초기배치 이외에는 전혀 생산하지 않아도' 마지막까지 클리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히소카(해군) 또한 연료가 턱없이 부족하고, 폭격기 → 해군유니트는 공격이 되면서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는 이해할 수 없는 상성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고 있다. 기본적으로 바다가 아니면 움직일 수 없는데다 그나마도 전함은 해안에 접근 불가이며, 일부 스테이지에서는 아군 항구에 진입할 수 없는 오류(버그가 아닌 지형데이터의 처리 실수) 때문에 버린 말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공격력은 형편없어도 도시 점령으로 포인트를 벌 수 있는 아이젠이나 초중반에 활약하는 네이와는 달리, 이들은 마지막까지 버린 자식 취급을 받으며 플레이어의 사랑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이런 문제들은 복잡한 디버깅을 필요로 하는 프로그램상 버그가 아니라, 간단한 후반점검이나 몇 차례 테스트 플레이로도 쉽게 발견·수정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제작진의 사후관리능력에 심각한 의문을 품게 만든다. 발매 후 공식 사이트에 올라온 패치에는 이러한 문제점이 하나도 해결되지 않아서, 제작사의 조치를 기다리다 못한 몇몇 팬이 밸런스와 오류를 수정한 패치를 직접 만들어 인터넷에 배포하는 일까지 있었다. 비싼 게임을 구입해 주고 패치까지 손수 만들어내는 기특한 유저들을 보며 제작진들은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렸을까?

주1 : Zone of Control의 약자. 개별 유니트가 주위에 영향을 미치는 범위를 뜻하며, 「밴티지 마스터」, 「SFC판 마장기신」 등 대부분의 턴제 시뮬레이션 게임에 기본적으로 채용되어 있는 규칙. '이동중에 적 유니트와 인접했을 때 남은 이동력에 관계없이 그 자리에서 행동이 종료되는 현상'은 게임에서 ZOC가 적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예이다.

유니트 주위에 적용되는 ZOC.(진한 네모)


지도를 잔뜩 메운 내 파란 세이버 소우카.
이쯤 되면 전술이나 부대 운용은 안드로메다 저 너머로.

최종 스코어의 어마어마한 격차. 그야말로 '소우카 최강전설'!



▷총평 + 넋두리
캐릭터나 메카닉 디자인은 나쁘지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해 내 취향에 딱이다. 성우 연기는 훌륭하다. 평범하긴 해도 시나리오 역시 무난하다.
하지만 시대에 역행하는 불합리/불친절의 덩어리와도 같은, 그나마도 만들다가 중간에 대충 얼버무린 듯한 어설픈 게임 시스템과, 일부 유니트의 존재가치를 무색하게 만드는 허접한 밸런스 때문에 전투 파트의 완성도는 동인게임에도 못 미치는 실망스러운 수준이 되고 말았다. 한때 PC용 전략게임으로 이름을 날렸던 회사, 명작으로 불리운 시뮬레이션 시리즈를 제작했던 팀이 만든 작품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
이렇게 어정쩡한 품질이라면 미소녀 게임 팬들에게는 '전투화면이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시뮬레이션 팬들에게는 '캐릭터와 성우 빼면 그만인 물건'이라고 싸잡아 비난을 듣는 것도 당연한 결과이다. 정통 시뮬레이션은 토끼팀(파워돌, 시퀀스 팔라디움 등) 전문이니 곰돌이팀 작품은 어쩔 수 없다고? 유감이지만 슈발츠쉴트 시리즈를 기억하고 있는 올드팬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변명.
이녀석을 '전략게임'으로 여기고 플레이할 바엔 차라리 「패미콤 워즈」나 「택틱스 오우거」같은 과거의 명작들을 즐기는 편이 훨씬 재미있고 유익한 경험이 될 것이다.

곰돌이팀 하면 트리스티아! 나노카 만세! '안 입었다' co2a 최고!
슈발츠쉴트?? 누가 기억합니까 그런 구시대의 유산.
에? 작품목록에 아직 있다고?! 치우는 걸 깜빡했네.


신선하진 않아도 먹음직한 재료(전략 시뮬레이션 + 메카미소녀)에, 양념이나 도구(시나리오, 캐릭터, 성우)도 나쁘지 않았다. 조리와 뒷마무리만 똑바로 되었다면 훨씬 괜찮은 물건이 나왔을 텐데… 매상 뻥튀기를 위한 '결산월에 신작 몰아치기'가 관례처럼 되어버린 지금 처지에서 제대로 된 디버깅이나 베타테스트를 바라는 것은 역시 무리일까?(주2)
회사의 간판으로 90년대를 헤쳐왔던 시뮬레이션 게임들이 황혼을 맞이하고, 미소녀와 모에(萌え)로 중무장한 신작들이 그 자리를 꿰차고 있는 현재의 코가도 스튜디오를 바라보며, 이들의 예전 작품을 좋아하는 팬으로서는 복잡한 기분이다.

주2 : 현재 코가도 스튜디오의 결산은 6·12월(2004년까지는 3·9월)로, 신작들이 나오는 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제작팀마다 여건에 차이는 있겠으나, 이 시기에 발매되었던 「파워돌3」, 「파워돌6」, 「상황개시!」 등의 완성도와 해당 작품에 대한 평가를 생각해 볼 때, 결산에 쫓긴 무리한 제작일정이 부실한 후반작업과 각종 버그, 결과적으로는 작품수준의 저하로 이어진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게임성과 캐릭터(또는 시나리오)를 양립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성공한 작품은 분명히 있다.
과거의 코가도 작품들도 그러했고… 부탁이니까 자꾸 옛날타령하게 만들지 말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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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ARPEDI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