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작성 : 9791
원문 출처 : ASTATINE(http://blog.livedoor.jp/april_29/)
번역문 작성 : CARPEDIEM(mine1215@lycos.co.kr)
1차 게재 : C'z the day(http://mine1215.egloos.com/)
2차 게재 : C'z the day(http://mine1215.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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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위 사이트에 게재된 일본어 원문을, 동 사이트에 제시된 가이드라인에 따라 번역·전재한 것입니다.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 수정 및 첨삭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등장인물의 이름이 통일되지 않은 채 쓰이고 있는 것은 번역자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원문에서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또한 원문 작성자의 견해는 번역자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으며, 오역·오타를 제외한 본문 내용 자체에 관한 문의나 건의는 받지 않습니다.
-본 리뷰는 기본적으로 「팬텀 오브 인페르노(Phantom of Inferno)」를 플레이하여 엔딩을 본 유저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본문에는 작품의 전반적인 스토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재 플레이 도중이거나 플레이 예정인 분은 게임을 모두 클리어한 다음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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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ntom INTEGRATION」(원문 작성 : 2004.10.27.)
본작 「Phantom INTEGRATION(2004, Nitro+)」은 Nitro+의 처녀작이자 출세작인 「Phantom -Phantom of Inferno-(2000, Nitro+)」의 리메이크판. DVD-PG판(2002, Digiturbo)·PS2판(2003, PrincessSoft)을 거쳐 OAV(2004, KSS)까지 발매되었고, 이번에 다시 PC로 돌아온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DVD-PG 및 PS2판에서 추가 또는 변경된 이벤트·대화용 CG, 시나리오, 주제가, BGM 등을 집어넣고, 게임 시스템을 최신의 것으로 교체, 다수의 CG가 리페인트/리뉴얼되었다. 하지만 일부 CG는 구 PC판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신규 CG와의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기왕 리메이크할 바엔 전부 새로 그려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구작의 팬들을 고려하여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캐릭터 보이스는 없다. DVD-PG·PS2판에서는 실력파 성우를 기용하여 좋은 연기를 들려주었고, 앞서 발매된 「참마대성 데몬베인(斬魔大聖デモンベイン - 2003,Nitro+)」 또한 18금 게임이면서도 호화 성우진을 동원한 전례가 있어서 기대를 하였는데, 정가 5800엔이라는 저렴한 가격대에서는 역시 무리였던 모양이다. 억지로 성우를 변경하기보다는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지만(특히 히로인 3명)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Give to him who asks you, and from him who wants to borrow from you do not turn away.]
(---마태복음 5 : 42)
'필요로 하는 사람이 원한다면 거절하지 말고 주라'. 이것은 유명한 신약성서의 한 구절.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주는 자'는 그 행위를 강제당하고 있으며, 그 '주어진 것'이란 다름아닌 살인기술이라는 것이다. 이는 츠바이가 당장 살아나가기 위해 필요한 기술로, 이것이 없으면 그는 죽는 수밖에 없다.
'자신의 권리를 버리고 자신을 해하는 자에게 득이 되도록 행동하라'. 여기서 자신의 권리를 버린다 함은 바로 암살자가 되는 것.
「살아가는 방식을 택하는 것과 그 삶에서 승리자가 되는 건 별개야」
(---클로디아, 제1부 : 폐공장)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곧 죄이고, 살인기술을 원하는 것이 큰 죄로 이어지는 길이라면,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가장 큰 원죄가 아닐까?
츠바이는 고민한다. 아인은 그를 정밀한 기계로 훈련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사이스 마스터가 나중에 그의 힘의 원천을 동기부여와 자신의 의지라고 평가했듯이, 츠바이는 끝까지 인간다운 감정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늘 고민하고,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에 관해 질문했다.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Whoever compels you to go one mile, go with him two.]
(---마태복음 5 : 41)
훈련받은 암살자이면서 스스로의 의지로 살인을 저지르는 이단자. 다른 누군가를 죽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벌하는 처형인. 조직에 속해 강제당하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갖는다. 이렇게 내·외면을 오가는 절묘한 밸런스가 츠바이의 안에서 맞춰졌을 때, 사이스가 예상치 못한 일종의 균열이 생겨났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소녀, 아인을 '습작'으로서 만들어낸 사이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츠바이가 자신과 같은 남성이라는 사실을.
츠바이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타인에게서 찾기 시작했는데, 그 때문에 아인은 망가지고, 칼은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클로디아조차 츠바이를 완벽히 지배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했을 정도로 그의 의지는 강했다.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If anyone wants to sue you and take away your tunic, let him have your cloak also.]
(---마태복음 5 : 40)
사이스가 사랑한 것은 도구로서의 아인. 그녀의 마음을 부정한 채 외면만을 갈고닦았다. 도구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옳은 행동이다.
사이스의 실패는 아인에게 츠바이의 교육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는 '남성', 아직 도구로 완성되지 않은 남성이었다. 설령 아인이 츠바이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않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사제관계라는 인간관계가 발생하며, 아인에게는 명령이나 상하관계 이외의 새로운 연결고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엘렌 루트 종반에서 사이스가 말한 것처럼, 아인은 명령에 의해서만 사람을 죽일 수 있도록 교육받은 인간이다. 그런 인간에게 이성에 대한 동료의식, 사제애, 모성애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손쉽게 애정으로 바뀔 수 있다.(챌렌 슈베스턴처럼 상대가 여성이었다면 모성애는 자매애로 바뀌었겠지만.)
어째서냐고? 동료의식, 사제애, 모성애라는 건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 이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아인에게서 찾고 있던 츠바이의 사고와 맞물려 서로 돕고 의지하는(상부상조) 관계가 된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던가? 아인도 츠바이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서로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 세계가 끝없는 지옥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네가 살아있기 때문이야」
(---아인, 제2부 : 폐공장)
그렇기 때문에 결국, 아인을 구원할 빛은 츠바이밖에는 없었다. 이는 그녀가 츠바이를 '또다른 나'라고 말했을 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극중에서 츠바이는 폐공장에 거울이 없는 것을 신경쓰는데, 그 이유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세뇌과정에 좋지 않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본다는 건 자신을 돌아보고 재평가하는 것. 명령을 실행하기만 하면 되는 암살자에게는 불필요한 행위이다. 그렇기에 아인이 '또다른 나'로서 츠바이를 거울로 삼았을 때, 그 운명은 결정되었다.
사이스는 남녀관계를 성적인 측면에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아인이 원하던 것은 마음의 지주. 매일, 매시간을 함께 지내고 있으면 '지키고자 하는' 의지는 더욱 깊어간다. 아인은 이 감정을 버리려고 시도했지만, 애초부터 사이스가 '상부상조'를 배제하고 있는 이상 그것은 자위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사이스는 자신의 완성작이라 할 수 있는 챌렌 슈베스턴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한다.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만, 결국 이 실수가 화근이 되어, 클로디아 루트의 '복수 엔딩'에서는 그녀들의 통제권을 츠바이에게 빼앗기고 만다.
이 엔딩에서 리지는 츠바이를 매우 혐오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챌렌 슈베스턴을 지배하기 위해 명령(교육/훈련)을 주된 수단으로 삼았던 사이스와 달리, 아마도 츠바이는 자신을 소녀들이 '사랑'을 바칠 대상으로, 애욕을 '상부상조'로 착각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애정을 수단으로 삼은 만큼, 소녀들을 도구 취급하는 이상으로 무거운 죄이다.
때문에 리지는 츠바이를 혐오했다. 클로디아가 똑같은 방법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온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Don’t resist an evil person. But whoever slaps you on your right cheek, turn the other to him also.]
(---마태복음 5 : 39)
이야기는 제1부에서 아인과 클로디아를 통해 '일상의 붕괴와 비일상으로의 전이', 제2부에서 칼과 클로디아를 통해 '비일상 속의 일상', 제3부에서는 엘렌과 드라이의 대립을 통해 '일상에 개입하는 비일상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애정'을 그리고 있다. 츠바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죄를 범하고, 그 대가를 제2부~3부에서 치르게 된다.
그는 결코 무저항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아인·칼·클로디아 세 사람에 대해서는 언제나 무저항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이유를 여성에게서 찾고 있던 츠바이 나름대로의 원칙일 수도, 또는 속죄라고도 할 수 있을까?
츠바이의 경우 기본적으로 자신이 바로 '악한 자'라는 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는 그가 보여주는 굳은 의지의 밑바탕이기도 하다. 그것을 이용당하면 클로디아 루트로,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면 엘렌/칼 루트로 가게 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악으로 단정지음으로써 자신과 상부상조하는 여성 이외의 전부를 장해물로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특히 제2부에서 츠바이는 아인, 칼 또는 클로디아(+ 동료로서의 리지) 이외의 인물은 인간조차 아닌, 단지 일을 위한 목표물로 여길 뿐이다. 이 시기의 그는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선 위치에 서 있으며, 이러한 비일상과 칼이 있는 일상의 대비가 제2부의 주요 테마이기도 하다.
그러나 얄궂게도 제2부의 클로디아, 또는 제3부에서의 칼처럼, 츠바이를 해치려는 '악한 자' -성경에서 말하는 적대자- 는 모두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때문에 그는 계속 무저항으로 있으려 한다. 제3부에서 레이지가 엘렌과 칼 사이에서 방황하며 꼼짝하지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애시당초 그는 그녀들과는 적대할 의사가 없었으니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마태복음 5 : 38)
마태복음 5 : 38~42의 내용은 원래 '복수해선 안된다' =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는 것. 다시 말해 그 주제는 복수의 무의미함을 설파하며 복수할 권리를 부정하는 데 있다. 이 부분은 문맥상 '이웃사랑'을 시사하는 구절로도 유명하지만, 그 가르침을 거꾸로 짚어 보면 「팬텀」이라는 이야기의 근간이 된다. 그만큼 이 작품은 보편적인 인류애를 부정하며, 암살자라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증거하고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구약성서에 기록된 '인간은 일반적으로 공격을 받게 되면 복수를 생각하고, 복수를 할 때는 자신이 받은 이상으로 보복하려 한다'는 인간의 업을 바탕에 깔고 제3부는 막을 올린다.
제3부에서는 세 히로인이 가진 사랑하는 방식의 차이가 명확해진다. 엘렌은 공감 → 의존으로, 칼은 애정 → 증오로, 미오는 사모 → 결심으로 바뀌어 간다.
제1부에서 처음으로 '츠바이'가 된 그날 이후 이제까지 늘 강자의 모습으로 표현되던 레이지는, 여기서 처음으로 약자로서 그려진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잘 생각해 보면 제3부는 '여자'로서의 의지를 건 히로인들의 다툼이자, 레이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녀들이 벌이는 싸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순수한 사랑'을 그려내기 위해,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을 맺기 위해서이겠지만, '일상에 개입하는 비일상'이라는, 지금까지 비일상을 현실적으로 차곡차곡 묘사해 왔던 부분이 제3부에 들어서서 급격히 빛을 바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붕괴하는 일상과 일상적인 여자의 싸움이 극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이야기는 급격하게 현실감을 잃고 만다. 일부에서 본작의 스토리가 '헐리우드풍'이라는 평을 듣는 것은 이 부분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말하자면 「팬텀」에 해피엔딩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로 엔딩을 놓고 봐도 이 이야기에 완전한 해피엔딩은 존재하지 않는다. 엘렌과 칼의 엔딩은 그 대가로 다른 한쪽의 생명을 요구하며, 미오 엔딩은 칼과는 결별한 채로 끝난다.
엘렌이 종종 지적하듯이, 레이지는 재주좋고 약삭빠른 인간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밖에 사랑하지 못하며, 한 사람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엘렌은 하나뿐인 '연인'보다 파트너인 '여동생' 역을 택한 것이고, 단적으로 말해 이는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룬 것에 불과하다.
――목숨을 걸고 사랑한다.
말하기는 간단하다. 그러나 '정말로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수많은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면 목숨을 버리는 묘사가 많이 눈에 띈다. 하지만 「팬텀」에서는 이 '목숨을 버린다'는 표현은 주인공보다 히로인 쪽에 중점이 놓여 있다.
「안 그래? 오늘까지의 너한테는 흔들림없이 자신을 지탱해 주는 게 있었어」
(---칼, 해안 : 엘렌 배드엔딩)
칼에게 레이지가 쓰러지는 엔딩에서, 칼은 복수의 화신이 된 엘렌에게 죽음을 당하며 이렇게 내뱉는다.
그녀 역시 엘렌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엘렌이 레이지를 마음의 지주로 삼고 그것을 '친애(親愛)'라는 형태의 애정으로 표현했듯이, 칼 또한 마찬가지 감정을 '증오'라는 형태의 맹목적인 애정(盲愛)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마음의 지주'를 놓고 벌어지는 히로인들의 처절한 다툼이 「팬텀」의 또다른 모습을 이루고 있다.
엘렌과 칼은 결코 나란히 설 수 없다. 두 사람을 이끌어 줄 길잡이는 오직 레이지 하나뿐이며, 그녀들과 바깥세계를 이어주는 접점 또한 레이지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도와줘… 레이지… 나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엘렌, 해안 : 엘렌 배드엔딩)
엘렌의 이 배드엔딩은 너무나도 비통하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적도 길잡이도 없다. 칼을 죽이는 그 순간, 엘렌은 이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었다. 그녀와 칼에게는 '일상'과의 다리가 필요했으며, 그게 바로 레이지였던 것이다. 레이지를 잃은 엘렌이 영원한 고독을 맛보게 될 운명이란 것을 이 마지막 대사는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오 엔딩에 관해서는 결론만 말하기로 하자. 어째서 그녀의 엔딩에선 히로인이 죽지 않냐고 묻는다면, 미오는 「팬텀」의 히로인 가운데 가장 약하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제일 강한 여성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어느 엔딩에서도(심지어 자신의 엔딩에서도!) 그녀의 미래는 레이지와 함께하지 않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실을 이해하고, 레이지의 지친 영혼을 달래주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엘렌이나 칼이 레이지를 통해서만 외부세계에 대응할 수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홀로 자립해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미오는 다른 히로인보다 훨씬 강한 존재이다.
물론 그 '강함'의 이면에는 희생이 있다. 오빠인 다이스케가 미오에게 가족의 사랑을 쏟아주었고, 시가가 다이스케로부터 이어받은 약속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켜낸 덕분에, 그녀의 생명은 이들의 생명을 딛고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이다. 미오 엔딩에서, 그녀는 이 모든 원죄를 간직한 채로 일상을 살아간다. 결국 그것은, 자신의 죄에 말려들어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비일상' 속의 팬텀에 비하면, 다른 의미에서 굳세게 사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오의 존재는 비일상과 일상의 대비 이상으로, 강한 삶의 대비라는 점에 그 의미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엔딩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는다. 미오는 죄를 짊어진 채 살아가는 히로인이니까.
그리하여 이 작품 본래의 주제인 '흉폭한 무법세계에 피어나는 순수한 사랑'은 엘렌과 칼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레이지가 '한 사람밖에 사랑하지 못하고, 한 사람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인 이상, 두 사람이 '마음의 지주'를 놓고 벌이는 이 애증극은 결과적으로 어느 한쪽의 죽음을 요구하게 된다.
이후 Nitro+ 작품의 기초가 된 「팬텀」이지만, 유일하게 후속작들에 계승되지 않은 요소가 있다면 극중에서 각 히로인들이 자신의 '강함'을 서로 대비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비극은 남의 일이기 때문에 비극이며, 주인공에게 닥친다면 그것은 시련으로 바뀐다. 이러한 시도를 계기로 삼아 Nitro+는 주인공에게 역경을 안겨주는 설정을 즐겨 사용하게 된 것 같다.
실제로 다음 작품인 「흡혈섬귀 베드고니아(吸血殲鬼ヴェドゴニア - 2001, Nitro+)」 부터는 히로인보다 주인공에게 중점을 두는 스타일로 나아가고 있다. 그 결과 「팬텀」에서 쌓아올린 하드보일드 노선을 지켜나감과 동시에, '멋진 주인공'을 묘사하는 능력에서 업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흥미로운 결과이다. 아마도 그것은 시원스런 스토리를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히로인을 그렇게 몰아붙일 필요가 있을까?'라는 제작자의 고민으로도 비친다.
「이런 식으로 남을 미워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엘렌, 교내 : 칼 엔딩)
「넌 결코 날 잊지 않을 테니까」
(---칼, 예배당 : 엘렌 엔딩)
엘렌은 칼에게 '마음의 지주'를 넘겨주고, 칼은 레이지에게 '마음의 지주'를 돌려주며 세상을 떠난다. 이야기의 결말은 반드시 누군가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며, 이어받은/살아남은 쪽은 그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죄를 짊어진다. 단, '이것은 괴로워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과는 완전한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답게 치열한 삶을 헤쳐나가는 것'에 주안점이 있으며, 그러한 면에서 둘의 엔딩은 미오의 것과는 다르다.
본작에서 엘렌과 칼의 엔딩이 갖는 의의는 자기긍정, 그리고 자신과 동등한 가치의 상대를 향한 애정. 마지막까지 레이지와 모든 것을 함께하려는 칼과, 자신의 뿌리를 더듬으며 인간으로서 레이지와 대등한 입장에 서고자 하는 엘렌의 이야기이다. 남들 눈엔 불행하게 보일지라도 상관없다. 그 가치란 결국 자신 안에 있는 거니까.
이야기는 맨 처음에,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가장 큰 원죄가 아닐까?'라고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답했다.
「저 드높은 하늘이 가르쳐 주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무엇인가, 그런 것들에 신경쓸 필요는 없다고」
(---엘렌, 초원 : 엘렌 엔딩)
――그저, 하늘.
――창공에 있는 모든 것들은 평등하고, 햇살 속에는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은 대지와 함께, 풍요를 푸르름으로 바꾸어 인간에게 내린다.
「너한테서 받은 이름이 있어. 너와 함께 지내온 기억이 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난 지금부터 살아나갈 수 있어」
――사람을 식별하는 것은 이름. 사람을 인식하는 것은 기억.
――살아가는 그 자체가 가장 큰 원죄라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건 종(種)으로서의 본능이자 행복.
――죄는 살아서 갚는 수밖에 없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게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지.
이야기는 마태복음 5 : 38~42 -복수의 무의미함과 복수할 권리에 대한 부정- 의 가르침을 거꾸로 짚어올라가, 그 결과 가장 처음의 질문으로 회귀한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들이 잊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행복'. 일상 속에 있기 때문에 더욱 잊지 말아야 할, 그 취약함에 대한 교훈.
행복을 바라는 행위에 의미가 있고, 곁에 있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Give to him who asks you, and from him who wants to borrow from you do not turn away.]
다시한번 말해 보자. '필요로 하는 사람이 원한다면 거절하지 말고 주라'. 이것은 유명한 신약성서의 한 구절.
이 작품의 미덕은, '주는 자'는 무거운 죄를 짊어지고 있으며, 그 '주어진 것'은 바로 이름과 기억이라는 점. '세상에서 가장 멋진 것은 자기 자신과,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는, 기쁨으로 가득한 결말을 플레이어에게 선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웃는다.
――「팬텀」은, 단지 그 사실을 전하기 위해 여기에 '이야기'로서 존재하고 있다.
원문 출처 : ASTATINE(http://blog.livedoor.jp/april_29/)
번역문 작성 : CARPEDIEM(mine1215@lycos.co.kr)
1차 게재 : C'z the day(http://mine1215.egloos.com/)
2차 게재 : C'z the day(http://mine1215.tistory.com/)
들어가기 전에
-본 리뷰는 위 사이트에 게재된 일본어 원문을, 동 사이트에 제시된 가이드라인에 따라 번역·전재한 것입니다.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 수정 및 첨삭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등장인물의 이름이 통일되지 않은 채 쓰이고 있는 것은 번역자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원문에서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또한 원문 작성자의 견해는 번역자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으며, 오역·오타를 제외한 본문 내용 자체에 관한 문의나 건의는 받지 않습니다.
-본 리뷰는 기본적으로 「팬텀 오브 인페르노(Phantom of Inferno)」를 플레이하여 엔딩을 본 유저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본문에는 작품의 전반적인 스토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재 플레이 도중이거나 플레이 예정인 분은 게임을 모두 클리어한 다음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원문과 번역문에 관한 권리는 각각 해당 작성자에게 있습니다. 이 번역문을 타 사이트로 전재 또는 이동하실 경우에는 지금 읽고 계신 이 머릿말 -원문 및 번역문 작성자·출처 등- 을 포함한 본문 전체를 일체의 수정/변경 없이 옮겨가 주시고, 번역문 작성자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말은 전해지지 않아.
구세주도 찾아오지 않아.
그래도 네 곁에는 내가 있어.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갈 내가.
구세주도 찾아오지 않아.
그래도 네 곁에는 내가 있어.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갈 내가.
「Phantom INTEGRATION」(원문 작성 : 2004.10.27.)
본작 「Phantom INTEGRATION(2004, Nitro+)」은 Nitro+의 처녀작이자 출세작인 「Phantom -Phantom of Inferno-(2000, Nitro+)」의 리메이크판. DVD-PG판(2002, Digiturbo)·PS2판(2003, PrincessSoft)을 거쳐 OAV(2004, KSS)까지 발매되었고, 이번에 다시 PC로 돌아온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DVD-PG 및 PS2판에서 추가 또는 변경된 이벤트·대화용 CG, 시나리오, 주제가, BGM 등을 집어넣고, 게임 시스템을 최신의 것으로 교체, 다수의 CG가 리페인트/리뉴얼되었다. 하지만 일부 CG는 구 PC판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신규 CG와의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기왕 리메이크할 바엔 전부 새로 그려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구작의 팬들을 고려하여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캐릭터 보이스는 없다. DVD-PG·PS2판에서는 실력파 성우를 기용하여 좋은 연기를 들려주었고, 앞서 발매된 「참마대성 데몬베인(斬魔大聖デモンベイン - 2003,Nitro+)」 또한 18금 게임이면서도 호화 성우진을 동원한 전례가 있어서 기대를 하였는데, 정가 5800엔이라는 저렴한 가격대에서는 역시 무리였던 모양이다. 억지로 성우를 변경하기보다는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지만(특히 히로인 3명)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이하 문장은 신약성서 마태복음 5 : 38~42의 각 구절을, 독단적인 시각에 따라 리뷰에 사용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용
납할 수 있거나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 분들만 읽어 주십시오. 또한 각 소절의 해석은 작성자의 독자적인 것으로, 본래 각 교회에서 쓰이는 해석과는 다를 경우가 있습니다.
※역주 - 번역문에 인용된 한국어 성경구절은 라이프성경(톰슨성경·라이프성경 편찬위원회 刊, 1990)의 것입니다.
납할 수 있거나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 분들만 읽어 주십시오. 또한 각 소절의 해석은 작성자의 독자적인 것으로, 본래 각 교회에서 쓰이는 해석과는 다를 경우가 있습니다.
※역주 - 번역문에 인용된 한국어 성경구절은 라이프성경(톰슨성경·라이프성경 편찬위원회 刊, 1990)의 것입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Give to him who asks you, and from him who wants to borrow from you do not turn away.]
(---마태복음 5 : 42)
'필요로 하는 사람이 원한다면 거절하지 말고 주라'. 이것은 유명한 신약성서의 한 구절.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주는 자'는 그 행위를 강제당하고 있으며, 그 '주어진 것'이란 다름아닌 살인기술이라는 것이다. 이는 츠바이가 당장 살아나가기 위해 필요한 기술로, 이것이 없으면 그는 죽는 수밖에 없다.
'자신의 권리를 버리고 자신을 해하는 자에게 득이 되도록 행동하라'. 여기서 자신의 권리를 버린다 함은 바로 암살자가 되는 것.
「살아가는 방식을 택하는 것과 그 삶에서 승리자가 되는 건 별개야」
(---클로디아, 제1부 : 폐공장)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곧 죄이고, 살인기술을 원하는 것이 큰 죄로 이어지는 길이라면,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가장 큰 원죄가 아닐까?
츠바이는 고민한다. 아인은 그를 정밀한 기계로 훈련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사이스 마스터가 나중에 그의 힘의 원천을 동기부여와 자신의 의지라고 평가했듯이, 츠바이는 끝까지 인간다운 감정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늘 고민하고,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에 관해 질문했다.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Whoever compels you to go one mile, go with him two.]
(---마태복음 5 : 41)
훈련받은 암살자이면서 스스로의 의지로 살인을 저지르는 이단자. 다른 누군가를 죽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벌하는 처형인. 조직에 속해 강제당하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갖는다. 이렇게 내·외면을 오가는 절묘한 밸런스가 츠바이의 안에서 맞춰졌을 때, 사이스가 예상치 못한 일종의 균열이 생겨났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소녀, 아인을 '습작'으로서 만들어낸 사이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츠바이가 자신과 같은 남성이라는 사실을.
츠바이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타인에게서 찾기 시작했는데, 그 때문에 아인은 망가지고, 칼은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클로디아조차 츠바이를 완벽히 지배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했을 정도로 그의 의지는 강했다.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If anyone wants to sue you and take away your tunic, let him have your cloak also.]
(---마태복음 5 : 40)
사이스가 사랑한 것은 도구로서의 아인. 그녀의 마음을 부정한 채 외면만을 갈고닦았다. 도구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옳은 행동이다.
사이스의 실패는 아인에게 츠바이의 교육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는 '남성', 아직 도구로 완성되지 않은 남성이었다. 설령 아인이 츠바이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않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사제관계라는 인간관계가 발생하며, 아인에게는 명령이나 상하관계 이외의 새로운 연결고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엘렌 루트 종반에서 사이스가 말한 것처럼, 아인은 명령에 의해서만 사람을 죽일 수 있도록 교육받은 인간이다. 그런 인간에게 이성에 대한 동료의식, 사제애, 모성애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손쉽게 애정으로 바뀔 수 있다.(챌렌 슈베스턴처럼 상대가 여성이었다면 모성애는 자매애로 바뀌었겠지만.)
어째서냐고? 동료의식, 사제애, 모성애라는 건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 이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아인에게서 찾고 있던 츠바이의 사고와 맞물려 서로 돕고 의지하는(상부상조) 관계가 된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던가? 아인도 츠바이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서로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 세계가 끝없는 지옥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네가 살아있기 때문이야」
(---아인, 제2부 : 폐공장)
그렇기 때문에 결국, 아인을 구원할 빛은 츠바이밖에는 없었다. 이는 그녀가 츠바이를 '또다른 나'라고 말했을 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극중에서 츠바이는 폐공장에 거울이 없는 것을 신경쓰는데, 그 이유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세뇌과정에 좋지 않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본다는 건 자신을 돌아보고 재평가하는 것. 명령을 실행하기만 하면 되는 암살자에게는 불필요한 행위이다. 그렇기에 아인이 '또다른 나'로서 츠바이를 거울로 삼았을 때, 그 운명은 결정되었다.
사이스는 남녀관계를 성적인 측면에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아인이 원하던 것은 마음의 지주. 매일, 매시간을 함께 지내고 있으면 '지키고자 하는' 의지는 더욱 깊어간다. 아인은 이 감정을 버리려고 시도했지만, 애초부터 사이스가 '상부상조'를 배제하고 있는 이상 그것은 자위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사이스는 자신의 완성작이라 할 수 있는 챌렌 슈베스턴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한다.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만, 결국 이 실수가 화근이 되어, 클로디아 루트의 '복수 엔딩'에서는 그녀들의 통제권을 츠바이에게 빼앗기고 만다.
이 엔딩에서 리지는 츠바이를 매우 혐오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챌렌 슈베스턴을 지배하기 위해 명령(교육/훈련)을 주된 수단으로 삼았던 사이스와 달리, 아마도 츠바이는 자신을 소녀들이 '사랑'을 바칠 대상으로, 애욕을 '상부상조'로 착각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애정을 수단으로 삼은 만큼, 소녀들을 도구 취급하는 이상으로 무거운 죄이다.
때문에 리지는 츠바이를 혐오했다. 클로디아가 똑같은 방법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온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Don’t resist an evil person. But whoever slaps you on your right cheek, turn the other to him also.]
(---마태복음 5 : 39)
이야기는 제1부에서 아인과 클로디아를 통해 '일상의 붕괴와 비일상으로의 전이', 제2부에서 칼과 클로디아를 통해 '비일상 속의 일상', 제3부에서는 엘렌과 드라이의 대립을 통해 '일상에 개입하는 비일상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애정'을 그리고 있다. 츠바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죄를 범하고, 그 대가를 제2부~3부에서 치르게 된다.
그는 결코 무저항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아인·칼·클로디아 세 사람에 대해서는 언제나 무저항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이유를 여성에게서 찾고 있던 츠바이 나름대로의 원칙일 수도, 또는 속죄라고도 할 수 있을까?
츠바이의 경우 기본적으로 자신이 바로 '악한 자'라는 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는 그가 보여주는 굳은 의지의 밑바탕이기도 하다. 그것을 이용당하면 클로디아 루트로,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면 엘렌/칼 루트로 가게 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악으로 단정지음으로써 자신과 상부상조하는 여성 이외의 전부를 장해물로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특히 제2부에서 츠바이는 아인, 칼 또는 클로디아(+ 동료로서의 리지) 이외의 인물은 인간조차 아닌, 단지 일을 위한 목표물로 여길 뿐이다. 이 시기의 그는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선 위치에 서 있으며, 이러한 비일상과 칼이 있는 일상의 대비가 제2부의 주요 테마이기도 하다.
그러나 얄궂게도 제2부의 클로디아, 또는 제3부에서의 칼처럼, 츠바이를 해치려는 '악한 자' -성경에서 말하는 적대자- 는 모두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때문에 그는 계속 무저항으로 있으려 한다. 제3부에서 레이지가 엘렌과 칼 사이에서 방황하며 꼼짝하지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애시당초 그는 그녀들과는 적대할 의사가 없었으니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마태복음 5 : 38)
마태복음 5 : 38~42의 내용은 원래 '복수해선 안된다' =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는 것. 다시 말해 그 주제는 복수의 무의미함을 설파하며 복수할 권리를 부정하는 데 있다. 이 부분은 문맥상 '이웃사랑'을 시사하는 구절로도 유명하지만, 그 가르침을 거꾸로 짚어 보면 「팬텀」이라는 이야기의 근간이 된다. 그만큼 이 작품은 보편적인 인류애를 부정하며, 암살자라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증거하고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구약성서에 기록된 '인간은 일반적으로 공격을 받게 되면 복수를 생각하고, 복수를 할 때는 자신이 받은 이상으로 보복하려 한다'는 인간의 업을 바탕에 깔고 제3부는 막을 올린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이 구절은 혼동하기 쉬운데, 눈에 해를 입은 사람이 복수하는 과정에서 상대를 죽게 만들었던
사고를 교훈삼아 '지나친 보복에 제동을 건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절대로 '당했다면 그대로 갚아줘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죄와 벌은 그 가치가 동등하며, 이를 넘어 상대방의 잘못에 도가 지나치게 응수하면 증오가 연쇄적으로
이어져 결국 수렁에 빠져들게 된다는 '지나친 보복의 무의미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3부에서는 세 히로인이 가진 사랑하는 방식의 차이가 명확해진다. 엘렌은 공감 → 의존으로, 칼은 애정 → 증오로, 미오는 사모 → 결심으로 바뀌어 간다.
제1부에서 처음으로 '츠바이'가 된 그날 이후 이제까지 늘 강자의 모습으로 표현되던 레이지는, 여기서 처음으로 약자로서 그려진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잘 생각해 보면 제3부는 '여자'로서의 의지를 건 히로인들의 다툼이자, 레이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녀들이 벌이는 싸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순수한 사랑'을 그려내기 위해,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을 맺기 위해서이겠지만, '일상에 개입하는 비일상'이라는, 지금까지 비일상을 현실적으로 차곡차곡 묘사해 왔던 부분이 제3부에 들어서서 급격히 빛을 바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붕괴하는 일상과 일상적인 여자의 싸움이 극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이야기는 급격하게 현실감을 잃고 만다. 일부에서 본작의 스토리가 '헐리우드풍'이라는 평을 듣는 것은 이 부분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말하자면 「팬텀」에 해피엔딩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로 엔딩을 놓고 봐도 이 이야기에 완전한 해피엔딩은 존재하지 않는다. 엘렌과 칼의 엔딩은 그 대가로 다른 한쪽의 생명을 요구하며, 미오 엔딩은 칼과는 결별한 채로 끝난다.
엘렌이 종종 지적하듯이, 레이지는 재주좋고 약삭빠른 인간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밖에 사랑하지 못하며, 한 사람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엘렌은 하나뿐인 '연인'보다 파트너인 '여동생' 역을 택한 것이고, 단적으로 말해 이는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룬 것에 불과하다.
――목숨을 걸고 사랑한다.
말하기는 간단하다. 그러나 '정말로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수많은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면 목숨을 버리는 묘사가 많이 눈에 띈다. 하지만 「팬텀」에서는 이 '목숨을 버린다'는 표현은 주인공보다 히로인 쪽에 중점이 놓여 있다.
「안 그래? 오늘까지의 너한테는 흔들림없이 자신을 지탱해 주는 게 있었어」
(---칼, 해안 : 엘렌 배드엔딩)
칼에게 레이지가 쓰러지는 엔딩에서, 칼은 복수의 화신이 된 엘렌에게 죽음을 당하며 이렇게 내뱉는다.
그녀 역시 엘렌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엘렌이 레이지를 마음의 지주로 삼고 그것을 '친애(親愛)'라는 형태의 애정으로 표현했듯이, 칼 또한 마찬가지 감정을 '증오'라는 형태의 맹목적인 애정(盲愛)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마음의 지주'를 놓고 벌어지는 히로인들의 처절한 다툼이 「팬텀」의 또다른 모습을 이루고 있다.
엘렌과 칼은 결코 나란히 설 수 없다. 두 사람을 이끌어 줄 길잡이는 오직 레이지 하나뿐이며, 그녀들과 바깥세계를 이어주는 접점 또한 레이지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도와줘… 레이지… 나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엘렌, 해안 : 엘렌 배드엔딩)
엘렌의 이 배드엔딩은 너무나도 비통하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적도 길잡이도 없다. 칼을 죽이는 그 순간, 엘렌은 이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었다. 그녀와 칼에게는 '일상'과의 다리가 필요했으며, 그게 바로 레이지였던 것이다. 레이지를 잃은 엘렌이 영원한 고독을 맛보게 될 운명이란 것을 이 마지막 대사는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오 엔딩에 관해서는 결론만 말하기로 하자. 어째서 그녀의 엔딩에선 히로인이 죽지 않냐고 묻는다면, 미오는 「팬텀」의 히로인 가운데 가장 약하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제일 강한 여성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어느 엔딩에서도(심지어 자신의 엔딩에서도!) 그녀의 미래는 레이지와 함께하지 않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실을 이해하고, 레이지의 지친 영혼을 달래주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엘렌이나 칼이 레이지를 통해서만 외부세계에 대응할 수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홀로 자립해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미오는 다른 히로인보다 훨씬 강한 존재이다.
물론 그 '강함'의 이면에는 희생이 있다. 오빠인 다이스케가 미오에게 가족의 사랑을 쏟아주었고, 시가가 다이스케로부터 이어받은 약속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켜낸 덕분에, 그녀의 생명은 이들의 생명을 딛고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이다. 미오 엔딩에서, 그녀는 이 모든 원죄를 간직한 채로 일상을 살아간다. 결국 그것은, 자신의 죄에 말려들어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비일상' 속의 팬텀에 비하면, 다른 의미에서 굳세게 사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오의 존재는 비일상과 일상의 대비 이상으로, 강한 삶의 대비라는 점에 그 의미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엔딩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는다. 미오는 죄를 짊어진 채 살아가는 히로인이니까.
그리하여 이 작품 본래의 주제인 '흉폭한 무법세계에 피어나는 순수한 사랑'은 엘렌과 칼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레이지가 '한 사람밖에 사랑하지 못하고, 한 사람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인 이상, 두 사람이 '마음의 지주'를 놓고 벌이는 이 애증극은 결과적으로 어느 한쪽의 죽음을 요구하게 된다.
이후 Nitro+ 작품의 기초가 된 「팬텀」이지만, 유일하게 후속작들에 계승되지 않은 요소가 있다면 극중에서 각 히로인들이 자신의 '강함'을 서로 대비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비극은 남의 일이기 때문에 비극이며, 주인공에게 닥친다면 그것은 시련으로 바뀐다. 이러한 시도를 계기로 삼아 Nitro+는 주인공에게 역경을 안겨주는 설정을 즐겨 사용하게 된 것 같다.
실제로 다음 작품인 「흡혈섬귀 베드고니아(吸血殲鬼ヴェドゴニア - 2001, Nitro+)」 부터는 히로인보다 주인공에게 중점을 두는 스타일로 나아가고 있다. 그 결과 「팬텀」에서 쌓아올린 하드보일드 노선을 지켜나감과 동시에, '멋진 주인공'을 묘사하는 능력에서 업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흥미로운 결과이다. 아마도 그것은 시원스런 스토리를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히로인을 그렇게 몰아붙일 필요가 있을까?'라는 제작자의 고민으로도 비친다.
「이런 식으로 남을 미워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엘렌, 교내 : 칼 엔딩)
「넌 결코 날 잊지 않을 테니까」
(---칼, 예배당 : 엘렌 엔딩)
엘렌은 칼에게 '마음의 지주'를 넘겨주고, 칼은 레이지에게 '마음의 지주'를 돌려주며 세상을 떠난다. 이야기의 결말은 반드시 누군가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며, 이어받은/살아남은 쪽은 그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죄를 짊어진다. 단, '이것은 괴로워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과는 완전한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답게 치열한 삶을 헤쳐나가는 것'에 주안점이 있으며, 그러한 면에서 둘의 엔딩은 미오의 것과는 다르다.
본작에서 엘렌과 칼의 엔딩이 갖는 의의는 자기긍정, 그리고 자신과 동등한 가치의 상대를 향한 애정. 마지막까지 레이지와 모든 것을 함께하려는 칼과, 자신의 뿌리를 더듬으며 인간으로서 레이지와 대등한 입장에 서고자 하는 엘렌의 이야기이다. 남들 눈엔 불행하게 보일지라도 상관없다. 그 가치란 결국 자신 안에 있는 거니까.
이야기는 맨 처음에,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가장 큰 원죄가 아닐까?'라고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답했다.
「저 드높은 하늘이 가르쳐 주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무엇인가, 그런 것들에 신경쓸 필요는 없다고」
(---엘렌, 초원 : 엘렌 엔딩)
――그저, 하늘.
――창공에 있는 모든 것들은 평등하고, 햇살 속에는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은 대지와 함께, 풍요를 푸르름으로 바꾸어 인간에게 내린다.
「너한테서 받은 이름이 있어. 너와 함께 지내온 기억이 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난 지금부터 살아나갈 수 있어」
――사람을 식별하는 것은 이름. 사람을 인식하는 것은 기억.
――살아가는 그 자체가 가장 큰 원죄라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건 종(種)으로서의 본능이자 행복.
――죄는 살아서 갚는 수밖에 없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게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지.
이야기는 마태복음 5 : 38~42 -복수의 무의미함과 복수할 권리에 대한 부정- 의 가르침을 거꾸로 짚어올라가, 그 결과 가장 처음의 질문으로 회귀한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들이 잊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행복'. 일상 속에 있기 때문에 더욱 잊지 말아야 할, 그 취약함에 대한 교훈.
행복을 바라는 행위에 의미가 있고, 곁에 있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Give to him who asks you, and from him who wants to borrow from you do not turn away.]
다시한번 말해 보자. '필요로 하는 사람이 원한다면 거절하지 말고 주라'. 이것은 유명한 신약성서의 한 구절.
이 작품의 미덕은, '주는 자'는 무거운 죄를 짊어지고 있으며, 그 '주어진 것'은 바로 이름과 기억이라는 점. '세상에서 가장 멋진 것은 자기 자신과,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는, 기쁨으로 가득한 결말을 플레이어에게 선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웃는다.
――「팬텀」은, 단지 그 사실을 전하기 위해 여기에 '이야기'로서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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