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復學)과 더불어 본인의 손을 즐겁게 하며 열 성상(星霜)을 함께했던 제도 기계필(機械筆)이 마침내 오늘로 그 수명(壽命)을 다하도다. 정가(定價) 一千원에 불과한 공산품(工産品)이라고는 하나, 긴 세월 쌓인 애틋한 정분(情分)이야 어찌 사람에 비하여도 못할 바가 있으랴.마지막 순간까지 미욱한 주인(主人)을 위해 온몸을 바친 그대에게 감사(感謝)와 추모(追慕)의 마음을 담아 이 글을 남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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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모씨(某氏)는 두어자 글로써 필자(筆者)에게 고(告)하노니, 인간 학생(人間學生)의 손 가운데 종요로운 것이 필이로대,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到處)에 흔한 바이로다. 이 필은 한낱 작은 물건(物件)이나,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情懷)가 남과 다름이라.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손 가운데 지닌지 우금(于今) 십 년이라. 어이 인정(人情)이 그렇지 아니하리요. 슬프다.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心身)을 겨우 진정(鎭定)하여,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懷抱)를 총총히 적어 영결(永訣)하노라.


연전(年前)에 우리 부친(父親)께옵서 사업차(事業次) 전국(全國)을 돌아 보신 후에, 문구 여러 쌈을 주시거늘, 친척(親戚)과 원근 일가(遠近一家)에게 보내고, 지인(知人)들도 쌈쌈이 나눠 주고, 그 중에 너를 택(擇)하여 손에 익히고 익히어 지금까지 해포되었더니, 슬프다, 연분(緣分)이 비상(非常)하여, 너희를 무수(無數)히 잃고 부러뜨렸으되, 오직 너 하나를 연구(年久)히 보전(保全)하니, 비록 무심(無心)한 물건(物件)이나 어찌 사랑스럽고 미혹(迷惑)지 아니하리오. 아깝고 불쌍하며, 또한 섭섭하도다.


나의 신세(身世) 박명(薄命)하여 곁에는 한 정인(情人) 없고, 인명(人命)이 흉완(凶頑)하여 일찍 죽지 못하고, 가산(家産)이 빈궁(貧窮)하여 부업(副業)에 마음을 붙여, 널로 하여 생애(生涯)를 도움이 적지 아니하더니, 오늘날 너를 영결(永訣)하니,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이는 귀신(鬼神)이 시기(猜忌)하고 하늘이 미워하심이로다.


아깝다 필이여, 어여쁘다 필이여, 너는 미묘(微妙)한 품질(品質)과 특별(特別)한 재치(才致)를 가졌으니, 물중(物中)의 명물(名物)이요, 문구(文具)중의 쟁쟁(錚錚)이라. 민첩(敏捷)하고 날래기는 백대(百代)의 협객(俠客)이요, 굳세고 곧기는 만고(萬古)의 충절(忠節)이라. 추호(秋毫) 같은 부리는 말하는 듯하고, 두렷한 꽁무니는 어이 듬직하더냐. 공책(空冊)과 지편(紙片)에 습작(習作)과 퇴고(推敲)를 수놓을 제, 그 민첩하고 신기(神奇)함은 귀신(鬼神)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人力)이 미칠 바리요.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연인(戀人)이 귀(貴)하나 손에서 놓일 때도 있고, 친우(親友)가 순(順)하나 명(命)을 거스릴 때 있나니, 너의 미묘(微妙)한 재질(才質)이 나의 전후(前後)에 수응(酬應)함을 생각하면, 연인에게 지나고 친우(親友)에게 지나는지라. 철함(鐵艦)으로 집을 하고, 연심(鉛芯)으로 속을 넣어 책상 위에 두었으니, 학자(學者)의 벗이라. 밥 먹을 적 만져 보고 잠잘 적 만져 보아, 널로 더불어 벗이 되어, 여름 낮에 주렴(珠簾)이며, 겨울 밤에 등잔(燈盞)을 상대(相對)하여, 누비며, 쓰며, 고치며, 그으며, 덧적을 때에, 너를 손에 드니 점정(點睛)를 맺는 듯, 줄줄이 써 갈 적에, 수미(首尾)가 상응(相應)하고, 솔솔이 붙여 내매 조화(造化)가 무궁(無窮)하다. 이생에 백년 동거(百年同居)하렸더니, 오호 애재(嗚呼哀哉)라, 필이여.


금년 일월 스무 아흐레 사시(巳時)에, 희미한 등잔 아래서 진도(進度)를 점검하다, 무심중간(無心中間)에 뿌드득 휘어지니 깜짝 놀라와라. 아야 아야 필이여, 네 심() 이 휘었구나. 정신(精神)이 아득하고 혼백(魂魄)이 산란(散亂)하여, 마음을 빻아 내는 듯, 두골(頭骨)을 깨쳐 내는 듯, 이윽토록 기색 혼절(氣塞昏絶)하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만져 보고 이어 본들 속절 없고 하릴 없다. 편작(扁鵲)의 신술(神術)로도 장생불사(長生不死) 못하였네. 동네 장인(匠人)에게 때이련들 어찌 능히 때일손가. 한 팔을 베어 낸 듯, 한 다리를 베어 낸 듯, 아깝다 필이여, 사면을 살펴 보니, 무사한 곳이 없네.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내 삼가지 못한 탓이로다.


무죄(無罪)한 너를 마치니, 백인(伯仁)이 유아이사(由我而死)라, 누를 한(恨)하며 누를 원(怨)하리요. 능란(能爛)한 성품(性品)과 공교(工巧)한 재질을 나의 힘으로 어찌 다시 바라리요. 절묘(絶妙)한 의형(儀形)은 눈 속에 삼삼하고, 특별한 품재(稟才)는 심회(心懷)가 삭막(索莫)하다. 네 비록 물건(物件)이나 무심(無心)하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다시 만나 평생 동거지정(平生同居之情)을 다시 이어, 백녁 고락(百年苦樂)과 일시 생사(一時生死)를 한 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 오호 애재(嗚呼哀哉)라, 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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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ARPEDI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