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2009. 9. 14. 01:59
저자 : 시미즈 아키
출판사 : 미디어팩토리
발매 : 2007.02.


모처에서 '여성 작가가 그린 삼국지 인물전'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 주문한 삼국지 캐릭터 단편집.
일단 주인공 선정부터가 비범한데

황충, 종회, 감녕, 맹획, 간옹

황충·감녕이야 나름 지명도는 있다지만 삼국지 세계가 워낙 인간병기급 괴수들이 우글대는 동네이고, 원작 극후반에 등장하는 탓에 별 건덕지가 없는 종회와 맹획, 유비 세력의 초창기 멤버이지만 존재감이 거의 없는 간옹까지. 진삼국무쌍이나 코에이 삼국지같은 소위 '메이저 취향'에 맞춘 게 아니란 것은 확실하다.
그렇게 골라잡은 인물들을 가지고

-수염을 잡힌 채 손자를 어르고, 전쟁터에서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노장군 황충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고 누구보다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은 나머지 끝없는 야심을 불태우다 스러진 마마보이(?!) 종회
-본시 한인(漢人)으로, 우여곡절 끝에 남월로 옮겨와 살게 되었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계속 고향을 그리워하는 맹획

이런 파격적인 재해석을 시도하는데, 그 과정에서 꼼꼼하게 묘사된 중국 복식과 소도구들, 각종 중국 고사의 적절한 인용(노자의 '무위사상'을 놓고 토론까지 벌인다!!), 인물끼리 대화시 서로 자(字)를 부른다거나 하는 철두철미한 연출까지… .
굳이 본문을 다 읽지 않더라도, 단행본 맨 처음에 나오는 삼국시대 개괄(+ 당시 중국 지도)이나, 각 인물전 앞머리에 실린 -정사에 기반한- 인물 소개만 보더라도 원작에 대한 작가의 지식과 이해가 어느 정도인지, 항간에 쏟아지고 있는 '삼국지'라는 이름만 빌린 싸구려 캐릭터물과는 차원이 다른 물건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아래는 작중에서 인상깊게 읽었던 대사들로

「묵직하고, 단단하고, 든든한… 그런 남자가 되고 싶었는데… 이렇게 약해빠져서야.
옛날 일만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울컥하는구려」
(황충전)

「내가 죽여버린 녀석은, 아무 거리낌 없이 부정한 짓을 하고 세금을 부풀려서 자기 배를 채웠어! 이 지방엔 그런 놈들이 셀 수도 없다고!
말도 안 되는 세금을 매기고는 뇌물을 바치라더니, 그것도 모자라 온갖 명목으로 세금을 뜯어가고! 나중에는 인두세라면서 노예사냥까지!
그래 놓고 야만인이다 뭐다 깔보며 자기네가 한 짓을 정당화하더군! 남월인들이 얼마나 한에 착취당하고 있는지 아나?!
…여기 사람들은 한인인 나한테도 차별 없이 대해 줬어. 사람을 죽이고 도망친 나를….
야만인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맹획전)

「확 집어삼켜 버리라고, 천하 따위. 안 그럼 재미없잖아?
한중왕이 되고 나면 조조를 때려잡고, 그 다음엔 손권도 해치워서 나중에는 결국 황제가 된다는 거지?
탁군의 망나니가 황제폐하라, 이보다 재미난 일이 또 어디 있겠나?」
(간옹전)

-'오호대장'이라는 최강의 칭호 뒤에 가리운 여리고 인간적인 노장의 모습
-촉한 정통론과 제갈량 덕분에 한없이 미화되었으나, 결국 그 실체는 소수민족 억압에 지나지 않았던 남만 정벌의 본질
-군신관계나 정통론이라는 허울에 얽매이지 않고, 고락을 함께한 친구의 앞길을 계속 지켜보고 싶다는 순수한 소망

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여러 역본과 평론을 접해 보았지만, 피비린내나는 전쟁과 모략으로 얼룩진 '삼국지'란 물건에서 이렇게 애틋하고 사람 냄새 풍기는 이야기들을 뽑아낼 수 있다니. 원작을 잘 알고 깊이 이해하며, 거기에 확실한 자기 색깔을 더해 새로운 캐릭터를 그려낸 작가의 내공이 감탄스러울 뿐이다.

여러 모로 신선하고 멋진 작품인 것은 분명하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한국어판이 정식으로 발매되지 않았다는 것. 동 작가가 그린 「괴력난신 쿠완」 단행본 말미에 몇 편인가 실려 있다고 하는데… 본 단편집이 나왔다는 정보는 확인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삼국지 역본을 읽어 보고, 정형화된 서술이나 인물상에 의문/싫증을 느끼고 있는(+ 언어의 압박을 극복할 능력이나 열성을 보유한) 삼국지 팬이라면 충분히 가치가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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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ARPEDIEM